생존을 위한 집단의식

활자에의 욕망 | 2008/05/18 15:14 | 이방인

2007년 8월 26일, 한참 대선에 대한 열기가 달아오를 때 뉴스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들렸다.

"국민의 염원인 정권교체를 위해.."

한나라당의 누군가였다. 당연히 야당에서 할 수 있는 말이다. 어느 나라나 이런 표현을 쓸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너무나도 많은 곳에서 전체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표현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런 표현들의 의도에 곧잘 호응해준다. '네티즌의 힘'을 보여주자느니, '국민의 염원'이라느니 하는 것들이 대표적이다. 특히 '황우석 사건', '디워 논쟁' 등에서 일부 네티즌들은 마치 모든 네티즌들의 의견을 대변하는 양 선동하는 표현을 썼다.

나는 개인주의자가 되려 노력한다. 2002년 월드컵 때는 내가 먼저 빨간 옷을 입고, 빨간 옷을 입지 않은 사람들을 못마땅해했다. 전체가 하나 될 때 느끼는 감동은 지금도 좋아한다. 그러나 뭉클거리는 감동을 주는 전체주의의 이면에는 개인의 희생이 있다. 예전에는 개인의 희생을 가벼이 생각했지만, 이제는 감동을 포기하더라도 희생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구분 못 하는 사람들이 있다. 개인주의의 기본 사고방식은 '내가 싫은 건 남도 싫다'이다. 결과적으로는 남을 배려하는 것이 개인주의이다. 내가 싫은 건 남에게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데 남이 내가 하는 일에 간섭한다면 짜증이 날 수 있다. 남이 나를 간섭하는 게 싫다면 나도 남을 간섭하지 않는다.

이기주의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개인주의 정반대가 전체주의인데,
'내가 하니까 너도 하라'는 것이 그것이다. 모두가 빨간 옷을 입는데 넌 입지 않는가. 다들 자랑스러운 디워가 재밌다고 하는데 넌 왜 별로라고 하는가(니 한국 사람 맞나?). 나는 군대 와서 개고생했는데 너는 왜 하지 않는가.

한국에는 전체주의적 사고가 넘쳐나지만 사람들 개개인은 극단적 이기주의이다. 전체주의는 항상 활개를 치지만 상황에 따라서 집단의 크기는 달라지고, 상황마다 집단 이기주의로 발현된다. 전체주의의 대표적인 예 중 하나인 민족주의는 처음부터 민족과 민족 간의 배타성을 바탕으로 깔고 있기 때문에 폭력성과 집단 이기주의를 내포할 수밖에 없다. 전체주의는 '우리는 하나다'라는 표어를 내걸 수 있지만 거기서 하나란 인류애나 사해 동포주의 속의 하나와는 다르다. 인류애나 사해 동포주의는 개인의 고통을 어루만진다는 측면에서 오히려 개인주의에 가깝다. 한국에서의 전체주의는,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집단의식'이기 때문에 개인의 이기성 혹은 집단의 이기성이 강하다.
 
한국인 중 다수가 가진 생존집단의식의 학습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 민족주의와 혈연주의를 바탕으로 한 전체주의 사회에서 집단에서 소외당하면 살아갈 수가 없다. 거기서 오는 두려움이 (보다 큰) 집단에 붙는 속성을 키운다. 이 왕따 탈출을 위한 이기주의 학습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집단에 속해 있다는 만족감을 주고,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자아의 범위를 넓히게 된다. 이렇게 자아의 범위가 늘어나 버린 상황에서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이 자신의 이익과 동일화되고, 집단에 손해가 되는 일이 생기면 모두에게 집단에 매몰되길 강요하고서 집단 이기주의를 발현시킨다.

'생존을 위한 이기성 학습(왕따 탈출)' + '집단의식' = '극단적 집단 이기주의'를 낳는다.

'국민의 염원', '네티즌의 힘'등의 표현의 남발은 이러한 집단의식을 이용한 것이자, 집단의식 결과 그 자체이다. 이 집단의식이 비이성적이라는 걸 알면서 쓰는 사람은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이고 모르고 쓰는 사람은 집단의식의 결과 그 자체이다.

한국에서는 언제나 왕따가 되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한다. 집단에서 벗어나면 집단의 폭력성이 무차별적으로 가해질 것이기에. 나처럼 사회성이 없는 사람은 더더욱 두려워해야 한다. 왕따가 되면 안 된다는 불안감과 집단에 속해 있다는 안도감을 쉴새없이 번갈아 느끼며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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