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 1억이 넘는 회사원 00만 명, 이번 주 1등 당첨자 0명, 서점의 한 코너에 모여 있는 주식 대박 낸 개미들, 주로 케이블을 통해 방송되는 강남 20~30대의 라이프, 공중파에서 최초 공개를 항상 달며 방송되는 연예인들의 화려한 집 구경, 상품권 오천만원짜리가 잘 팔린다는 뉴스 등등. 극소수에게만 해당되는 일들을 우리는 늘 미디어로 접한다. 미디어들이 그들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이유는 그것이 대다수의 사람에겐 호기심을 자극하는 뉴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뉴스를 접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흔히 말하는 ‘상대적 박탈감’을 경험한다. 그리고 자기도 혹시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헛된 희망을 갖는다. 매 주 10명 가까운 사람이 1등에 당첨이 되니 나도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릴 수가 없고, 강남에서 저런 생활을 하는 사람이 저렇게도 많은데 내 생활은 왜 이 모양인지 비관을 지울 수가 없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들은 (미디어에 의해) 선택된 사람들. 당연히 평범한 사람의 주위에는 그들과 같은 사람들을 쉽게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미디어 때문에 그런 사람들의 비율을 실제보다 높게 추정하는 착각에 빠진다.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주변사람의 범위는 사실 100명에서 많아야 한 다리 건너 500명 정도이다. 간간히 라도 연락하는 사람들을 모두 합치고, 또 그 사람들을 통해서 접하는 또 다른 사람들을 다 합쳐도 그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인간 뇌의 진화의 대부분이 일어났던 600만 년 전에서 10만 년 전 사이에 이루었던 군락의 크기도 150명 내외로 추정한다. 누가 그랬다더라는 소식을 들으면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100~500명 정도의 모집단을 무의식적으로 상정할 것이다. 그런데 매스 미디어를 통해 국내는 물론 전 세계의 별의 별 특이한 사람들을 접할 수 있는 지금에 와서는 소식의 전달에 물리적 한계는 없다. 다만 미디어가 무엇을 보도하기로 선택하느냐에 의해서만 한계가 진다.
로또 1등에 당첨된 10명의 사람들은 소개되지만 5등도 당첨되지 못한 수백만 명은 소개되지 않는다. 아니 소개된다 해도 감조차 오지 않는다. 수백만 명의 모집단에서 10명 내외의 사람들의 비율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100명 중 1명이나 3명 정도라면 감이 오지만, 확률 자리수가 0.1% 이하로 내려가면 0.01%이든 0.0001%이든 차이를 체감할 수가 없게 된다. 하물며 확률이 0.0000001%대인 로또는 어느 정도의 확률인지 경험을 통해서는 추정할 수 없다. 그런데 미디어에서는 매주 1등에 당첨 된 사람들이 계속 나온다. 누군가가 된다는 건 확실하고 확률에 대한 감은 없으니, 마치 나도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만약 진짜로 당첨에 대한 감을 느끼고 싶다면, 로또를 샀던 사람들 모두의 명단과 당첨금을 나열해놓은 문서를 억지로 하나씩 모두 다 본다면 가능할 것이다.
주식 대박을 터뜨린 사람들, 강남에 사는 부자들, 연봉 1억을 받는 사람들의 옆에는 그렇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미디어에서 그들을 다루는 비율은 편파적이다. 설사 극소수의 사람들과 거기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5:5, 아니 3:7로 다루더라도 편파적인 것이다. TV를 많이 보는 사람일수록 미디어에 노출되는 비율을 실제 비율로 착각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성을 발휘해 통계적으로 사고하는 습관을 들인다면 착각에서 빠져 나올 수 있지만, 그럼에도 방송을 볼 때마다 부러움에 입맛을 다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미디어를 통해 노출되는 사회 구성원의 비율을 실제 사회 구성원의 비율로 착각하는 일, 인지의 한계로 스포트라이트를 비춘 사람들의 특이성을 과소평가하는 일을 ‘스포트라이트 효과’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잘 나가는 친구 아들을 통해 자기 아들을 압박하는 ‘엄친아’에 대한 스트레스 또한 미시적인 스포트라이트 효과라고 할 수 있다.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이 사회의 ‘엄친아’들은 승자독식사회와 찰궁합을 발휘하며, 스포트라이트 밖의 절대 다수에게 환상과 좌절을 지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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