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저 논란으로 세상이 흉흉한 지금 평소 호형호제 하던 친구가 루저 중의 루저인 나의 의견이 굼긍하다고 하여 쓴다.
2.
나는 미수다의 기준으로 따지면 루저 중에도 탑클래스의 루저고, 현아의 기준으로도 루저다. 내 평생소원 수십가지 중 하나가 제발 170만이라도이고, 하루빨리 여성들의 하이힐처럼 키높이에 대해도 사람들이 무감각해지길 기다리는 중이다. 부모님을 봐도 그리 크게 될 씨앗은 아니었지만, 수많은 날의 고민을 통해 170도 못 된 것은 결국 내 잘못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수십가지 키가 크지 않을 이유가 이렇게 복합적으로 절묘하게 중첩될 줄은 결과론이지만 몰랐다. 나의 키는 중 2 때 성장률의 정점을 찍고 중 2와 중 3 사이 어느 시점의 변곡점을 지나 중 3 때부터 지수함수적으로 성장률이 둔화되었다. 다른 성격적인 이유나, 신체적인 이유를 제외하고, 내 키가 170이 안 된 결정적 이유 중 하나로 케이블 방송의 보편화를 꼽을 수 있다. 12시 쯤 시작해서 늦을 때는 3~4시 정도에 끝나던 봄/여름 패션쇼만 아니었어도, 수면시간이 하루 평균 두 시간씩은 더 보장되었을 것이다. (봄/여름 패션쇼를 왜 봤냐는 질문에는 대답하기가 곤란하다. 내가 패션에 관심있는 사람은 아니고, 그저 청소년기의 젊은 혈기.. 때문이라면 적당히 알아들어주길 바란다.)
3.
나는 아직도 키가 지금보다 10센치가 컸다면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건 진짜로 믿고 있는 바인데, 키가 행동 유형에 미칠 일반적인 영향과 키를 고민할 시간에 다른 것을 고민했다면에서 출발하는 개인적인 사고실험을 바탕으로 내린 결론이다. 지금도 자아가 만들어내는 나의 외형적 모습은 실제의 키보다 큰 데, 그래서 가끔 전신거울을 볼 때 깜짝 깜짝 놀라기도 한다. "내가 이렇게 작았어?" 나로 여기던 모습과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키에 대한 고민은 별로 하지 않았는데, 초월했다기 보다는 체념한 것에 가깝다. 그리고 더 자랄 가능성이 0%가 된 상황에서 실용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까치발을 들고 내 키가 이만했다면 어땠을까. 지금 생각해도 설레는 상상이지만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작은 키보다도 아직도 그런 상상을 하는 내 자신이 한심해 보인다.
4.
키에 대한 선호는 진화론적으로 생각하면 어쩔 수 없긴 한데, 그래도 키에 대한 여성의 요구가 과도하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육체적 능력이 중요했던 구석기시대만큼 키가 생존에 절실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연애 상대로 키 큰 남자를 원하는 것은 환경의 변화를 유전자가 못 따라가는 유전자 지체 현상의 영향도 일부 있는 것 같다. 물론 키라는 것이 영양상태에 영향을 많이 받고, 덩치에서 나오는 심리적 제압력은 현대사회에도 여전히 중요하며, 여기에 서구에 대한 열망이 더해져서 굳이 진화심리학의 가정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키에 대한 요구를 현대 한국 사회에서도 부정할 수 없다. 한가지 특이사항은 연애할 때는 키 큰 남자를 간절히 바랄지라도 결혼의 경우 키와 재력 등의 능력 중 선택해야 한다면, 나이가 들수록 현대사회의 생존환경에 맞는 재력을 택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이는 초기에 코딩되어 있던 키에 대한 욕구를 실질적인 선택의 순간에 낮추었다는 것인데, 변화된 환경에 일일이 적응하기에는 너무나 느린 유전자를 뇌가 보완해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연애 한 번 못하고 결혼만 한다면 조금 씁쓸하긴 하다. 외모 자체에 대한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회가 되기에는 요원해 보이고, 아무튼 이런 사회에서는 나를 좋아해 줄 짝을 적은 모집단에서 구할 수밖에 없다.
5.
키에 관한 재미있는 실험이 있다. 똑같은 사람을 학생들 앞에 세우고, 한 번은 고위 공직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한 번은 (특정 직업을 지칭하기 민감하지만) 그리 사회적 지위가 높지 않은 직업의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나간 뒤 키를 추정해보라고 했는데, 학생들이 가늠했던 키의 평균은 고위 공직이라고 소개했을 때 더 높게 나왔다. 이는 사회적 지위가 높을 수록 키를 더 높게 추정한다는 것이고, 사회적 위압감이 (오오라처럼) 키의 인식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키가 작더라도 높은 지위에 오르면 키가 커 보일 수 있다는 희망일 수 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면 그 사람의 직업이나 지위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을 때, 임시적이지만 키가 큰 사람을 높은 지위의 사람으로 여긴다는 말이 된다. 슬픈 결과가 아닐 수 없다.
6.
이번 루저 논란에서 루저들이 단체로 발끈하긴 했지만, 사실 더 슬픈 현실은 더루저와 덜루저 사이에 연합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키에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이라면 자기보다 키가 작은 사람들에게 우월감을 느낄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 우월감은 키 순서대로 이어질 것이다. 우리는 10진법을 사용하고 평균이 175정도 되기 때문에 180 근처에서 키가 크다고 생각하는 선이 그어지게 되었고, 그것을 공개적으로 발언해버린 것이기 때문에 논란이 커졌다. 그 때문에 180이 안 되는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발끈하게 되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잠깐 뭉친 그들 사이에도 끊임없는 우월감과 열등감이 오고 간다는 것을 부인할 수 있을까. 오히려 열듬감에 찌들어있던 사람이 우월감을 더 갈망하기 마련이다. 결국 키에 대해 등수적인 시각을 가지다보면 열등감은 끝도 없게 된다. 꼭 키만이 그런 건 아니지 않는가.
7.
루저 논란을 통해 들었던 생각 중 또 한가지는, 여성들이 받았던 외모에 대한 압박이 쌓이고 쌓여, 더 이상 못참겠다는 폭발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만약 스트레스를 정량화 할 수 있다면 남자들이 키로 받아왔던 좌절감에 비하면 여성들이 외모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의 총합은 비교가 안 되게 클 것이다. 이제 더는 못 참겠다 너희들도 당해봐라가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이 루저 논란은 아닐까. 만약 얼굴도 못생기고 키도 작은 여자가 방송에서 그런 언급을 했다면, 제일 먼저 외모에 대한 공격이 가해지지 않았을까. 외국의 사례를 몰라 한국의 외모지상주의가 어느정도인지를 가늠할 순 없지만, 서로를 외모로 등급을 매기다가 지쳐 이제 갈때까지 간 상태인 것 같다. 그런데 남녀간의 이런 대결구도는 살짝 비대칭적인데, 얼굴은 키에 비해 돈을 주고 고치기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외모가 계층에는 불평등하지만 어쩄든 실현 가능성이 열려있다면, 남자의 키는 계층간은 평등하지만 인위적으로 키를 늘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뼈를 절단하는 수술이 있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사람 할 짓은 아닌 것 같다. 키높이 깔창을 까는 것은 여성이 하이힐을 신는 것이나 화장을 하는 것에 비교될 수 있을 것인데, 이 또한 여성의 화장이나 하이힐처럼 보편적으로 느껴지기에는 아직 요원한 것 같다. 남자들이 깔창을 신어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게 될 날은 언제가 될까. 그 날은 아마 지금의 여성에게 가해지는 외모에 대한 압박만큼이나 남성에 대한 외모의 압박이 커지는 날이 될 것이다. 그 날이 과연 올까? 그럴 것 같진 않다. 만약 그 날이 온다면, 남자들은 행복해질까? 지금의 여성들을 봤을 때 그럴 가능성은 더 희박해보인다.
8.
이런 저런 얘기 다 떠나서 이번 루저 사태는 구십 구퍼센트 제작진의 잘못이고, 키 작은 남자와 문제 없이 사귀고 있던 수많은 여성들에 대한 모욕이다. 외모'지상'주의는 이걸 어디서부터 풀려고 노력해야 되나..는 한숨 섞인 질문이 나오는 수많은 문제 중 하나이다. 한국사회에는 왜 이렇게 루저들이 많은 것일까. 하나의 기준(주로 숫자)으로 순위를 일등부터 매기고, 그 등수를 바탕으로 특정한 집단을 분류하는 한국인들의 (극우파적인) 습관이 외모지상주의를 만나 키 180 루저 논란이 발생한 것은 아닐까. 루저들의 나라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디서부터 접근해야 할까. 가치의 다양화라는 뻔한 대답이 있긴 한데, 내 자신의 키에 대한 열등감부터 어찌할 수가 없다. 나보다 '더루저'를 보며 힘을 내기는 너무 치사하지 않은가.
덧.
마지막으로 하나만 덧붙이자면, 말실수를 한 여자 못지 않게 걱정되는 것이 현아다. 현아 또한 큰 실수를 한 것인데, 이제 남자를 좋아할때도 주변 눈치를 봐야하는 상황이 됐다. 180의 남자와 스캔들이 났을 때 감당해야 할 '욕'들을 생각한다면, 우와 현아 팬은 아니지만 벌써 불쌍하게 느껴진다. 전략적 발언이 아니었을지라도 이상형만 좋아지는 게 어디 사람 마음인가. 비슷한 언급을 하게 될 떄는 (전략적으로) 그냥 상관 안한다거나 나보다 큰사람이면 좋겠다 정도로 두루뭉수리 대답하는 것이 제일 좋다. 170이라고 숫자를 말하면서 스스로 부담을 가짐과 동시에 170이 되지 못하는 남자들을 두 번 죽이게 되었다. 정말 여자들의 마지노선은 170일까. 역시나 내 앞가림부터 걱정될 뿐이다.

Comments List
역시나실망시키지않는군
나도 인터넷강의 후 OCN 으로 요약할수있는
고등학교 시절이 조금 후회되는구려
엄청난 기회비용을 지불했다.. ㅠㅠ